2002년 4월 태안 안면도에 국제꽃박람회 개최를 결정한 것은 최악의 결정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뜨악해하며 실패를 자신있게 장담하였습니다. 이유는 명확하였습니다. 1999년 IMF로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고, 도대체 모래사장에서 무슨 꽃을 피우냐는 이유였습니다. 안면도로 접근하는 도로는 왕복 2차선이 전부였고, 호텔은 커녕 변변한 민박집이나 식당조차 없었습니다.
해안가 바닷바람과 차가운 바다안개를 아는 사람은 비웃기조차 했습니다. 더욱이 박람회장은 한국 유리의 규사광산이었지요. 당시 심대평 지사가 꽃박람회 개최지를 안면도로 정한 것은 완전한 역발상이었습니다. 접근성이 좋고 자연환경이 우수한 천안, 공주를 제치고 이름도 생소한 오지 안면도를 결정한 것은 그곳이 낙후된 지역이였고 접근성도 나빴지만 뛰어난 경관의 개발잠재력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공이라는 잣대가 일반 사람들의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실패할 꽃박람회에 저는 현장 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결과는 기적적이었습니다. 안면도가 사람의 파도로 출렁였습니다. 박람회장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에 자동차가 즐비했고, 박람회장은 꽃보다 사람이 더 많이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당초 목표 방문객 72만 명을 뛰어넘어 164만 명이 물밀 듯이 밀려왔습니다.
하루 평균 방문객은 줄잡아 7만 명. 적은 예산에 2년여의 짧은 준비기간동안 매일이 지옥 같았던 우리들에게 박람회 24일간은 더욱더 지옥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옥이 끝난 후 꽃박람회 조직위 직원들은 전원이 정부포상의 천국을 맛보았습니다. 2002 안면도 꽃박람회의 진짜 성공은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꽃박람회가 끝난 후 그곳에 펜션과 콘도, 음식점, 리조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안면도가 충남 최고의 관광지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안면도의 주민들이 꽃박람회 개최로 지역개발이 10년 내지는 20년이 앞당겨졌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이유이지요. 진짜 목표를 달성한 것입니다. 최근 안면도와 보령 간 해저터널이 개통한 것도 안면도를 찾는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나타난 후방효과 중 하나입니다.
두 번째 안면도 꽃박람회가 개최된 것은 2009년 4월이었습니다. 2007년 12월 허베이스피리트호의 기름 유출 사고로 태안에 엄청난 재앙이 닥친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외국의 환경과 해양오염 관련 전문가들은 유출된 기름을 방제하는 데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여기에 그 지역에서 나는 수산물은 입에 댈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지옥같은 이곳에 다시 꽃박람회 개최를 결정한 분은 이완구 지사였습니다. 그때도 저는 충남도의 행정부지사로, 기름 유출 방제를 담당하는 현장 지휘관이었고, 그곳에서 130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자갈 하나하나를 닦아가며 복원하는 기적의 현장을 목도하면서 두 번째 꽃박람회를 추진했습다.
이번에는 기름 유출로 오염된 지역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였습니다. 2009년 국제꽃박람회 또한 대성공이었습니다. 2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오염된 환경이 아닌 꽃으로 아름답게 물든 안면도를 다시 보았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서해안 수산물을 먹어도 된다는 사실을 박람회장을 찾았던 사람들이 몸소 입증했습니다. 진짜 목적이 또 달성된 것입니다. 지금 안면도나 태안이 한때 기름 유출 사고를 겪은 부정적 인식이 없는 것은 기적의 자원봉사 행렬과 함께 아름다운 꽃박람회의 추억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국제행사, 메가 이벤트를 개최하려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단순히 비즈니스적 시각에서 수입과 지출을 맞추기 위해 개최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지타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한 승수효과입니다. 안면도 국제꽃박람회를 통해 지역개발의 효과와 도시의 이미지라는 브랜드 가치, 그리고 수산업이나 화훼, 관광산업이 발전하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지요. 의회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저는 안면도 꽃박람회를 생각하며 유수한 정원환경을 갖춘 세종에서 국제 정원도시 박람회라는 이름으로 안면도의 추억이 되살아나길 기대했었습니다. <저작권자 ⓒ 충청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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